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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물
    Writing Practice 2013. 5. 10. 03:41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자 저작권의 날이었다. 빼빼로 데이나 화이트 데이때 선물을 주고 받듯 책도 사서 읽고, 서로 선물도 하고, 음악도 많이 듣는 날이면 좋겠다. 책에 관한 글을 쓴 게 있어 괜히 올려본다. 작년 독서에 관한 백일장에 나가 운 좋게 약소한 상금도 받은 나에겐 나름 의미 있는 글이다. 4시간 만에 출제된 시제에 맞게 써서 제출해야 했기에 어설프긴 하지만.. 좀 더 책을 많이 읽고,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싶은 마음을 담아 올려본다. 시제는 “책으로 인한 분쟁”

    <선물>

    아침부터 미친듯 울어 대는 매미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매미는 조용한 우리 집을 자신의 울음소리로 포위라도 할 듯이 필사적으로 울어 댔다. 예전엔 매미가 시끄럽게 울면 더 더운 것 같고 화가 나기도 했었다. 말을 빨리 잘 할 수 없는 나는, 아니 긴장을 하면 자꾸만 말을 더듬는 나는 더듬지도 않고 큰 소리로 계속 계속 시끄럽게 구는 매미에게 짜증을 냈었던 것 같다. 그때 할아버지가 얘기해주셨다. 매미는 7년 동안의 기다림을 겪고 세상에 나와 단 7일을 저렇게 울다 떠난다고. 그러니 7년을 기다린 매미의 이야기를 7일 정도는 참고 들어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날 이후로 난 매미를 절대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별로 크지 않을 때엔 7일밖에 없는데 오히려 더 크게 울지 못함이 속상해졌다.

    청주댁 아줌마가 만들어 놓고 가신 밑반찬들을 꺼내고 달걀 후라이 하나를 부쳐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밖에서 매미가 함께 떠들어주니 혼자 먹는 밥이 오늘은 더욱 맛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식탁만 정리하고 설거지는 저녁때 몰아서 하기로 결정하고는 읽고 있던 책들을 몇 권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여름이긴 하지만 오늘은 제법 바람도 불고 시원하다. 난 방학이 시작된 이후로 계속 책만 읽고 있다. 평소에도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지만 요즈음 부쩍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서 그런지 하루 종일 책만 읽다가 자는 날도 많다. 

    할아버지는 책을 쓰시는 작가였다. 엄청나게 많은 베스트셀러들을 내셔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 책들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고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빠랑만 살고 있던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계신 이곳 공주로 내려왔다. 글을 쓰는 할아버지와 집안 일을 도와주시는 청주댁 아줌마가 나의 새 가족이었다. 그동안에도 방학이면 거의 할아버지 댁에 와서 지냈기에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때부터 말이 하기 싫어졌던 것 같다. 자꾸만 말하는 게 싫어지니 말하는 게 점점 더 어렵기만 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말을 더듬게 되다 보니 아예 입을 닫아 버리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유정이도 매미처럼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얘기하셨다. 어느 정도의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면 분명 다 괜찮아 질 거라고 이야기하시며 항상 안아주셨다.

    할아버지에게는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가끔 태우시는 담배 냄새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 책장에 있는 책을 열면 나는 고소한 먼지 냄새 같기도 한 할아버지 냄새. 학교에 다녀오면 늘 할아버지 옆에서 책을 읽었다. 내가 내용을 잘 알기 힘든,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오래된 책장을 넘기는 그 소리가, 그 고소한 책 냄새가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으면 할아버지에게 한없이 안겨있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나를 버려두지 않을 것만 같았다. 책 읽는 내가 예쁘시다며 할아버지는 엄청난 양의 책들을 자주 선물해 주셨다. 처음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서, 조용히 넘어가는 책장의 소리가 좋아 읽기 시작했던 책인데 자꾸 읽다 보니 할아버지가 옆에 안 계신 시간에도 책을 열심히 읽게 되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게 된 나이기에 매년 생일 선물로 책을 받는 것도 항상 행복한 일이었다. 

    14살이 되던 작년 생일, 할아버지에게 특별한 책을 선물 받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분홍색 보자기에 담긴 무거운 원고지 뭉치들. 할아버지가 직접 쓰셨지만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들이었다. 그 책들이 나를 대학에도 보내줄 것이고 혹여나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나의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엔 할아버지의 글씨가 담긴, 할아버지의 냄새가 담긴 특별한 책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내 생일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고는 한참을 술렁거리던 가족들. 특히, 혼자인 나를 계속 공주에 두어야 하는 문제들로 큰아버지와 고모들이 큰소리로 다투시던 나날들. 그 때만 해도 당장 큰아버지댁으로 갈지 고모댁으로 갈지 불안한 하루하루였지만 결국 나는 살던 집에서 청주댁 아줌마와 여전히 살고 있었다. 

    그날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주기 제사를 지내러 친척 분들이 다 공주로 모이셨다. 청주댁 아줌마를 도와 부침개와 전도 함께 만들며 친척들을 기다렸다. 사실, 난 큰아버지도 고모도 너무 불편하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생이 된 이후로는 많이 좋아진 것 같은 말을 더듬는 버릇들도 그분들 앞에 서면 더욱 심해진다. 내가 봐도 정말 장애가 있는 아이처럼. 그래도 이제는 나에게 남은 가장 가까운 가족들 이기에 소중한 분들이긴 하다. 

    제사를 마치고 청주댁 아줌마를 도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어른들이 나를 급히 부르셨다.
    “유정아, 유정아~ 이 보자기에 있는 원고들 혹시 할아버지가 쓰신거니?”
    순간 설거지를 하던 몸에 전기가 왔다. 
    “아니, 그.그.그.그게.. 아까. 집.집.집어.집어. 넣어...”
    어젯밤 내내 할아버지 생각을 하며 읽다 침대 옆에 놓았던 원고 보자기를 깜빡 잊고 치우지 않았나 보다. 안쪽으로 물기가 스며들어 잘 벗겨지지 않는 고무장갑을 던져 버리고는 내 방으로 뛰어갔다. 고모와 큰아버지 큰엄마가 심각한 얼굴로 원고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유정아, 대체 이게 뭐지? 할아버지가 발표 안 하신 작품 같은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지난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이것저것 서류들 정리할 때는 이게 어디 있었던 거니?”
    “우리도 모르고 있는 할아버지 작품을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니?”
    큰아버지와 고모는 빠른 속도로 나에게 질문을 하셨지만 질문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내 대답 속도는 더욱 느려져 갔다.
    “그.그.그게.. 제가.제가. 제가...숨긴 건. 아니.아니구요. 할아버지가.할아버지가...”
    답답해 하며 날을 세우고 내 입술만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의 눈빛을 보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그분들의 호기심과 궁금함이 기다림을 자꾸 가로막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눈두덩이와 목구멍이 뜨거워져 왔다. 
    “제가.. 제가.. 글.글.글로...”
    책상에 있던 연습장을 집어 들고 밀린 답안을 작성해나갔다. 
    작년 생일에 할아버지께서 제 생일 선물이라고 하시며 주신 원고예요. 혹시 할아버지 안 계시게 되면 저 대학도 보내 줄 원고라고 하시며 잘 가지고 있으라고 했어요. 일부러 몰래 숨기려고 한 건 아니예요. 저에게 주신 선물이니까 잘 가지고 있었어요.
    그분들이 원하시는 맞는 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답안지를 작성하고는 화장실로 달려가 한참을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서러웠고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마음을 정리하고는 어른들이 모여 계시는 거실로 갔다. 그곳엔 청주댁 아줌마도 앉아 계셨다. 다들 별 말씀이 없으셨다. 쭈뼛쭈뼛 화장실 문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신 큰아버지께서는 잠시 내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조용하던 거실에선 조금씩 각자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일 년 전과 그리 다를 바는 없었던 나의 거취 문제에 이번엔 할아버지의 미 발표 원고에 관한 이야기도 더해져 있었다. 
    “아버님 원고를 계속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요. 그건 독자들에게도 못 할 짓이고” 
    “넌 지금 독자들을 생각하는 거냐, 네 생각을 하는 거냐?
    “아니 오빤 지금 내가 뭐 인세나 욕심 내서 이런 말을 하는 줄 알아요?”
    “유정이도 여기 이대로 계속 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원고 앞에 ‘유정이 에게’ 라고 썼는데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엄연히 이건 유정이에게 준 선물이잖아. 물론 아무 공증도 증명서도 없긴 하지만.”
    “너는 예전엔 김서방 때문에 죽어도 안된다고 하더니 유정이를 이제 와서 왜 너희 집으로 데려간다는 건데?”
    “그렇다고 오빠가 데려가시면 새 언니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이번엔 오빠 마음대로는 안 될 거고 김서방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서로 대화를 한다기 보단 각자의 말들을 쏟아내고 계셨다. 혼란한 밤은 계속 되었고 매미는 미친 듯이 울어 대고 있었다. 요즘 한창을 열심히 울어 대던 매미였는데 이제 이 아이에겐 7일 중에 얼마의 행복한 시간이 남은 걸까? 나의 행복의 시간은 얼마나 남은 걸까? 이불을 덮고 매미와 함께 미친 듯 울었다. 내 남은 행복한 날이 끝나버릴 것 같은 예감을 지우기 위해 더듬지도 않고 계속 계속 울었다.

    잠시 잠이 들었었나 보다. 큰아버지의 부르심에 거실로 나갔다. 
    “유정아, 이게 할아버지께서 너에게 주신 선물이니깐 이건 네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이게 할아버지 작품 이니까 우리 출판을 할 생각을 함께 해 보자꾸나. 그리고... 너도 이제 조금 있으면 고등학교도 가야 하는데 이런 시골에 있는 것 보단 서울로 학교를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오빠. 여기 대전에도 좋은 학교들 세고 셌는데 오빠 마음대로 무슨 서울로 옮긴다고 자꾸 이러실까?” 유정이 봐준다고 하고 인세를 오빠 마음대로 할 작정인 거예요? 아빠 다른 작품 인세들 뒤로 빼돌렸던 것처럼?”
    “아니,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너 말 자꾸 그렇게 할래?”
    부글부글 무언가가 속에서 또 끓어 오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참았던 말들이 조금씩 끓어 넘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매미들도 절정으로 울어 대고 있었고 나의 뇌 속도 점점 끓고 있었다. 
    “아~~~~~~~악~~~~~! 제발 그만 좀 해!”
    “그냥 할아버지 선물이었어. 할아버지 마음이었다고!”
    발악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내일 세상이 끝날 매미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동안 갇혀있던 말들을 쏟아내며 울었던 것 같다. 그들과는 전혀 상관 없던 말들까지도. 나도 내가 어떤 말들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얼핏 엄마에 대한 원망까지도 했었던 것 같다. 

    미칠 것만 같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어른들은 밤새 이야기를 하시며 못 주무신 건지 푸석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시는 것 같았다. 고모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갈비찜을 아침부터 식탁에 내놓으며 ‘유정이 갈비찜 좋아하지 않았었나?’ 라고 어색한 대화를 시도하셨다. 끓어 오르던 어젯밤 과는 사뭇 다른 어색한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울던 매미들도 왠 일 인지 조용해진 아침. 
    ‘혹시, 벌써 다들 떠난건가?...’
    소화되기 힘든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일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내 생각이 제일 중요하니 당분간 어느 곳으로 갈 지 신중히 생각해 본 뒤 서울이든 대전이든 이사를 하고 이 집도 정리를 하는 걸로 하자고 어른들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짜증스럽던 날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 요즘 나의 일상은 너무도 평화롭다. 학교를 가지 않는 방학이기에 일어나면 할아버지가 늘 책을 읽으시던 바깥 테이블에 앉아 할아버지의 오래된 책들을 읽는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어른 책들. 여전히 이 책들을 제대로 이해할 나이가 안 되었지만 그래도 이 책들을 읽는 순간 만큼은 할아버지 냄새가 나니까, 할아버지가 내 곁에 앉아 계신 것 같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아직 어느 곳으로 갈지,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 평생의 친구로 함께 있을 수 있는 책들이 어디에 가나 있으니 그걸로도 웃을 수 있다. 잠잠하던 매미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여름 바람에서 고소한 책 냄새가 난다.
                                                                        by Eu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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